티스토리 뷰

일상다반사

붉은 물이 옅어질 무렵

빈 뜰 2025. 11. 22. 11:44
반응형

산중의 시계는 도시보다 한 발짝 앞서 돕니다. 11월도 하순으로 접어드니, 산은 이미 겉옷을 벗고 겨울 채비에 들어갔습니다. 뜰 앞에 서성이던 바람 끝이 제법 매서워져, 옷깃을 절로 여미게 되는 저녁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밤하늘은 유난히 투명해집니다. 머리 위로 쏟아질 듯 초롱초롱한 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 빛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허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게 됩니다. 가장 빛나는 순간은 찰나일 뿐, 이 밤이 깊어 새벽이 오면 저 별들 또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저 작은 별빛 하나가 묵묵히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방 안에 들어와 찻물을 올리고 가만히 손끝을 내려다봅니다. 지난여름, 뜰 앞의 꽃잎을 짓이겨 물들였던 붉은 흔적이 이제는 손톱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습니다. 첫눈이 올 때까지 이 붉은 물이 남아 있으면 애틋한 인연이 이어진다던, 그 옛날의 속설을 떠올려 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손톱은 자라나고, 물든 부분은 결국 잘려 나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순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붉은 흔적이 사라질까 조바심을 내며, 다가올 시간을 거스르려 합니다. 몇 밤만 지나면 사라질 것들에 마음을 묶어두고 있는 꼴이지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구름을 뚫고 나오는 달처럼, 어둠을 헤치고 환한 얼굴로 와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기다림이 길어지면 집착이 되고, 집착은 마음의 맑은 흐름을 막습니다.

오고 가는 것은 우리가 억지로 붙잡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꽃이 필 때가 되어 피었듯, 질 때가 되어 지는 것입니다. 저 별이 지기 전에, 손끝의 붉은 물이 다 빠지기 전에 누군가가 와주길 바라는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그 조급함이 오히려 당신의 오늘을 갉아먹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이제 곧 겨울입니다. 나무들이 잎을 다 떨구고 빈 몸이 되는 것은, 춥고 배고파서가 아니라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쥐고 있던 것들을 놓아주어야 할 때입니다.

손톱 끝에 남은 붉은 미련이 다 잘려 나가 '빈 손'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가올 새 계절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떠난 것은 떠난 대로, 지는 것은 지는 대로 두십시오. 빈 뜰에 달빛만이 가득 찰 때, 진정한 만남은 그때 비로소 찾아올 것입니다.

차 한 잔 마시기 좋은 밤입니다.

반응형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난한 마음이 길어 올린 별  (0) 2025.11.21
그 빛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0) 2025.11.2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5/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