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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 월도 어느덧 끄트머리, 이십사 일입니다.
산 아래 마을에는 첫눈 소식이 들려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 산중의 뜰은 이미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붉게 타오르던 단풍들은 미련 없이 제 몸을 땅으로 떨구었습니다. 가지 끝에 매달린 잎새 하나 없이, 나무들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정직한 알몸을 드러냅니다.
빈 숲을 거닐다 보면 문득 나무들의 침묵을 배웁니다.
저 나무들은 봄날의 화려한 꽃이나 가을날의 풍성한 열매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발밑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오가는 바람을 묵묵히 견딜 뿐입니다.
누군가를 마음에 둔다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 마음을 상대가 알아주기를, 내 존재가 그 사람 앞에서 빛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은 소유하려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존재가 넉넉히 숨 쉴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오늘 아침, 댓돌 위에 내린 묽은 볕을 봅니다.
햇살은 자신을 드러내려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저 차가운 대지를 감싸 안고, 이름 모를 풀포기가 얼지 않도록 조용히 온기를 나누어 줄 뿐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되어주고, 구름이 지나면 구름의 그림자가 되어주는 것. 그것은 비굴함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가장 깊은 배려이자 자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늘 앞모습만을 보려 합니다. 화려하고, 돋보이고, 시끄러운 것에만 눈길을 줍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아니 사람의 도리란, 누군가의 뒷모습을 지켜주는 일에 가깝습니다. 상대가 힘겨워할 때 묵묵히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림자 같은 마음 말입니다.
나무가 제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미련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리를 지켜야 숲이 되고, 새들이 깃들고, 마침내 쉴 그늘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일 월의 끝자락, 바람이 찹니다.
누군가의 곁에 머무르고 싶다면, 욕심을 덜어내고 맑은 빈 마음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조차 내려놓고, 그저 뜰 앞의 저 나무처럼, 밤하늘의 달빛처럼 은은하게 머무를 일입니다.
가장 위대한 말은 침묵 속에 있고, 가장 깊은 마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누군가의 뒤에서 서성이고 있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수행입니다.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빈 숲에 바람이 지나갑니다.
산거(山居)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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